현자의 돌이란? 앎을 위해서 어디로든 튈 수 있는 변형되는 돌이다. 돌을 굴려보자. 단단한 철을 만나면, 파괴되고 쇄신한다. 부드러운 눈을 만나면 불어나고 확장한다. 이렇게 현자는 세상과 만나서 지식을 먹고 먹힌다. 만물의 스승에게 듣고→ 익히고 → 펼치고 → 정리하고 → 안 좋은 것은 파괴하고, 좋은 것은 나누고 → 또 듣고 ······ 이렇게 ‘앎’을 순환하여 확장한다. 마치 자연이 나선 구조(클릭)로 범위를 넓히고, 우주가 증폭되는 것 같이. 그때 내 몸뚱이와 가까운 친구가 되고, 주위 사람/사물을 더 이해하고, 점점 세상 만물과 교감하여 품을 수 있다. ‘내 몸뚱이’ 자체가 ‘우주의 앎’이 되는 것이다. 앎을 신(神)나게 체득해보자!
깊이는 본질을 향하고, 넓이는 다양성을 향하며, 연결은 전체를 향한다. 이 세 축이 함께 순환할 때 생명은 나선형으로 성장한다.
왜 놀아야 하나?
모든 인간의 행위를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고대의 지혜였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해왔다. ···(중략)··· 하지만 놀이 개념은 이 세상 생활과 행위에서 뚜렷하면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in play), 그리고 놀이로서(as play) 생겨나고 또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혀 왔다. 「Homo Ludens 22p, 요한 하위징아」
승부 넘어 (돌이) 먹히는 짜릿함 그 속에 숨었던 청량감이 감돈다. 그 ‘순간’이 놀이의 본질이다. 오래토록 묶은 집념과 오기가 파괴되며, 정신은 새롭게 비상한다. 가슴이 트이는 상쾌함이랄까.
“판 위에서 돌이 먹히는 순간, 머릿속 계산은 멎고, 온몸에 묘한 전율이 번진다. 파괴됨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존재함.”
놀이의 정석(正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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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껄껄, 시원하게 웃으며 파괴되고, 깨지며 먹히겠다는 털털한 ‘여유 하나’면 된다.
시간과 돈을 편하게 소진하라. 놀이의 시공(時空)에서 만큼은 하나의 놀이 외에 모든 것(노동/스마트 기기)을 내려놓는다.
순간에 집중하라.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놀이로 ‘순간의 연속’에 빠져든다. 바로 그때 파괴의 시원함과 창작의 새로움을 맛본다.
좋은 것은 먹고, 쓰임이 다한 것은 먹혀라. 타자의 지혜는 맛있게 먹고, 내 강박은 시원하게 비워내라. 그 때 타자와 마음이 연결되고, 더 넓은 세계가 다가온다.
승부에 초연 하라. 보상이 없다면 승리의 쾌감과 패배의 따끔함은 결국 같은 감정이다. 좋고 나쁨은 없다. 오히려 졌을 때 깨닫는 경우가 많다. 이기든 지든 그 순간에 심취하여 놀지 않았는가? 무엇을 더 바라는가. 승리, 명예, 보상을 바라는 순간 놀이는 ‘노동’이 된다.
딥 바둑 Deep Baduk 돌에 마음을 담다, 돌의 무게만큼 무르익다
놀이를 고르는 한 수(手)
바둑을 두다 보면,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론 그저 몸이 끌리는 수(手)를 택하고 싶다. 이성적, 논리적 선택이 아니다. 놀 때 만큼은 내 원초적 동물의 육감에 맡겨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