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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린 내재성을 찾아서, 유용성을 파괴하는 놀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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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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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 신명 나게 놀아 보세!

30년을 넘게 바둑을 두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놀까? 논다고 쌀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혹자는 ‘놀이에서 이기면 재미있잖아’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맨날 이기면 시시하다. 고무줄놀이에서 나는 잘하는데 상대가 자꾸 줄에 걸리면, 놀이가 지속되지 않는다. 점점 지루해진다. 성취감도 못 느낀다. 다른 혹자는 ‘놀다 보면, 노동에 지친 스트레스가 풀린다’라고 말한다. 맞다.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왜 풀릴까? 여기에는 인류학적으로 심오한 이유가 숨겨져 있다. 바로 잊어버린 ‘내재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재성(內在性)을 한자 그대로 뜻풀이하면 ‘안에 숨겨진 성향’이다. 내 안에 뭐가 있길래, 놀이로 숨겨진 뭔가를 찾으려는 걸까? ‘파괴와 위반, 전복의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에 의하면, 내재성은 “나를 파괴해서, 자타의 경계가 없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나를 파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적인 관념과 물질적인 몸을 소진하는 것이다. 이는 애벌레가 허물을 벗는 것과 같다. 허물은 개미나 거미에게 먹혀서 파괴된다. 내 의식의 틀이 파괴되고 비워질 때, 자연히 타자의 의식이 스며들어 섞인다. 이때 커피 가루와 물이 만나서 커피가 되듯이, 자타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 순간 나와 타자는 하나가 되면서 신성(神聖)함을 느낀다. 이처럼 내재성을 회복할 때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재성을 회복할까? 유용성을 파괴하고 놀아라! 고대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이전부터 놀아왔다. 바타유는 놀이로서 인류가 성스러운 자부심과 신체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자부심을 그대로 결부시킨 모습으로서의 신체적 용모를 띄게 된 것은, 놀이할 때부터, 그리고 놀이함으로써 놀이에 영속성을 부여하고 예술 작품에 경이로움을 불어넣게 된 때부터다.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마네 68p, 조르주 바타유」
바타유가 말하는 놀이는 유용성을 파괴하는 데서 시작한다. 약 330만 년 전 인류는 도구를 발명했다. 도구는 ‘유용한 사물’을 만들어냈다. 기술의 발달로 사물들의 가치는 점점 우월과 열등으로 나뉘고, 돈은 모든 유용한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게 되었다. 구매 ‘수단’이었던 자본은 점점 강력해져서, 수많은 사람의 ‘목적’이 되었다. ‘비생명 자본’인 사물에 ‘생명 인간’이 종속된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은 과도하게 유용함을 추구하다가, 내 안의 ‘뭔가’를 잊어버렸다. 자본의 강력한 틀 속에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으로 노동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서 답답함을 느낀 인간은 유용성을 깨고 싶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파괴는 두렵다.
죽음과 파괴에 대한 태도: 고대인 vs 현대인
내재성이 충만했던, 아니 내재성으로만 존재했던 330만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때의 인류는 자연 그대로 동식물과 먹고 먹히는 관계였다. 인간과 동물은 우열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아니, 그런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조차 없었다. ‘자기의식’은 최소한 중추신경계가 발달한 동물에게서 ‘나‘라는 느낌과 “생각을 자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의식이 없는 인간은 그저 다른 포유류처럼 감정만 있었다.
동물과 인간의 감정을 연구한 뇌과학자 파크셉(Jaak Panksepp)은 포유류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일곱 가지 원초적 정서 시스템(공포, 분노, 탐색, 애착, 놀이 등)을 제시한다. 즉, “감정 행동 시스템”이 생존을 위해 (의식보다) 먼저 진화했다고 본다. (Science of the Brain as a Gateway to Understanding Play, American Journal of PLAY) 그래서 인간이 토끼를 잡아먹을 때, 의식이 없는 토끼는 그 순간만 공포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고대 인류는 호랑이에게 먹히더라도 그 순간만 두려움을 느꼈다. 자기의식이 없었던 인류는 평소에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저 먹고 먹히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이때 인류가 잡아먹혀서 느끼는 두려움은 ‘반드시 피하고 제거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의 이치대로 탄생했으면, 소멸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탄생은 좋고 소멸은 나쁘다’가 절대 아니었다.
이에 반해 많은 현대인이 ‘언젠가 죽는다’라는 사실에 엄청나게 두려워한다. 당장 죽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사회는 인간의 의식에 ‘죽음은 나쁘다’라고 강력하게 주입했다. 그래서 현대인은 조금만 아파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 미미한 증상의 감기조차도 약을 다발로 먹어서, 오히려 좋은 면역세포의 성장을 막는다. 지나친 청결 때문에 놀이터에는 흙이 없어지고 우레탄으로 바뀌며 자연과 멀어진다. 과한 마스크의 착용은 표정으로 보고 배우는 유아들의 사회성과 언어능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손끝만큼도 아프거나, 다치거나, 물리거나, 먹혀서는 안 되는 틀 속에 우리는 점점 두려움의 노예가 되고 있다.
축적이 커질수록 파괴욕은 세진다
한편 많은 현대인은 소멸과 파괴의 반대인 축적과 확장에는 열렬히 환호한다. 축적이 비대하게 쌓이면 싸일수록, 비우고 싶은 파괴욕은 세진다. 그런데도 제국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끝없이 질주한다. 생산은 멈추지 않고, 영토는 넓어져야 한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재산이 늘지 않으면, 왠지 억울하고 불안한 착각을 느낀다. 또한 음식은 점점 더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고, 사랑은 남이 보기에 점점 행복한 것처럼 있어 보여야 한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확장과 축적은 계속돼야 하고, 파괴와 소진은 최대한 제거해야 한다’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이 간격이 크면 클수록 인간은 자연과 타자와 멀어진다. 지구의 한정된 자원 속에 나만, 가족만, 내 회사만, 내 나라만 잘살고 성장하려면 자연히 남을 짓밟고, 이기고,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점점 자신의 표정과 호흡, 피부, 세포가 타자의 것과 섞일 틈이 없다. 참으로 답답하고 숨쉬기 힘든 세상이다. 점점 괴로움은 커진다.
잘나가는 유명인들이 한 방에 무너지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본다. 그들은 어렸을 적부터 경쟁에 승리하는 법을 강요받았고, 철저하게 기계처럼 성장과 성공만을 학습했다. 자연히 지거나 아프면 안 되었고, 유용한 기준이 명확한 목표를 향해 끝없이 1등이 돼야 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마침내 1등이 되어서 엄청난 인기와 부, 사랑을 얻었다. 그런데 그다음은? 그 1등을 끝없이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는 행위이다.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이 없는 인생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생명(生命)’이다. 변한다는 것은 ‘먹음과 먹힘’, ‘확장과 파괴’의 순환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가을에 풍족히 먹고 열매를 맺어 정점을 찍는다. 그다음 식물은 동물에 먹혀서 파괴된다. 동물은 털갈이를 통해 기존 털이 새로운 털에 파괴된다. 그리고 긴 겨울 동안 천천히 고요하게 쉬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다음 해 봄에 생명력을 분출하고 여름에 확장을 도모한다.
이처럼 진정한 새로움은 유용한 ‘자기 열매와 털의 파괴’에서 온다. 이는 기존에 내가 가진 핵심 가치를 갈아엎는 것이다. 어설프게 무늬만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목표와 기준이 매우 뚜렷한 분야에 정점을 찍은 사람들은 경쟁자들을 파괴하고 자신의 가치를 확장하는 데 익숙하다. 자신이 파괴당하는 것을 배워본 적이 별로 없다. 확장과 파괴, 먹음과 먹힘의 순환은 기본적인 생명의 이치지만, 그들에게 ‘파괴와 먹힘’이라는 단어는 너무 낯설다. 아니, 심지어 두렵다. 사회와 부모의 틀 속에서 ‘파괴와 먹힘’은 지독히도 나쁘고, 무섭고, 없애야 하는 것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에서 오는 정점의 지루함과 허무함을 깨기 위해,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이상한 파괴’의 유혹에 넘어간다. 그토록 힘들게 번 돈과 어렵게 관리해 온 체력을 마약, 섹스, 도박, 투기 등으로 과도하게 탕진한다. 심지어는 자살까지 이어진다. 파괴를 통한 새로운 도약을 사실 속으로는 너무도 원하기에, 330만 년 전부터 내재한 본능과도 같기에. 안타깝게도 그들의 파괴는 절실하기에 극단적으로 행해진다. 그만큼 힘들게 거대한 축적과 확장을 했으니, 파괴와 소진도 매우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용성의 파괴는 피할 수 없다
그래도 힘들게 얻은 부, 명예 등의 유용성을 꼭 파괴해야 하나? 그렇다.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억만장자도 돈을 저승에 가져갈 수 없고, 현세의 명예는 후대에 잊힌다. 파괴하지 않으면 자연히 파괴된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파괴되고, 파괴되어야 새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주 생명의 본능이자 이치이다. 우리가 유용한 것을 쌓고, 먹기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먹으면 똥을 싸야 한다. 안 싸면 죽는다. 유용했던 음식이 무용한 똥으로 배출된다. 똥은 거름으로 식물의 유용한 먹이가 된다. 우리가 먹은 식물에 의해서 우리의 똥이 먹히는 것이다. 즉 먹힌다는 것은 내 것이 파괴되는 것이다. 똥은 벌레와 식물이 흡수함으로 똥의 덩어리는 파괴되고, 분해된다. 그리고 벌레와 식물의 양분으로 유용하게 거듭난다(실제로 50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똥을 밭에 안 싸면, 어르신들은 혼을 냈다). 그리고 식물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그 열매를 유용하게 먹는다. 이것은 자연 스스로 그러한 순환의 이치이다. 먹었으면, 반드시 먹혀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는 먹고 또 먹고 좋은 것은 다 가지라고 유혹한다. 이것은 먹고 먹히는 자연의 순환 이치와 안 맞다. 거기서 엄청난 틈이 생기고 인간에게 재앙이 내린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 생명의 유전자는 ‘먹고, 먹힘’으로 세팅이 되어있는데, 갑자기 사회가 주입한다. ‘먹기만 하라고’ 헉! 그럼 우리는 심각한 위기를 느낀다. 똥을 안 싸면 배가 터져서 우리는 죽는다. 우리의 정신도 마찬가지. 내 자의식만, 내 가족만, 내 회사만 축적되고 증식되는 이론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타자의 생각을 안 받아들이고, 타자의 생각에 먹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흐르고 섞이지 않으면 고이고 탁해지는 법. 고인 물은 반드시 악취가 진동하고 썩는다. 결국 자민족, 자국 이기주의가 생기고, 생산과 성장에 더 이상 한계를 느낀 지구는 병든다. 온갖 과도한 성장에서 남은 쓰레기와 온실가스 때문에 온도가 상승하고, 이는 자연재해로 이어진다.
내재성 되찾기 1 : 식물에게 배우는 파괴 전략
파괴를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파괴돼야 하는가? 지구 역사상 인류보다, 공룡보다도 훨씬 더 오랫동안 왕성하게 생존을 이어온 ‘식물’의 사례를 살펴보자. 식물은 크게 2가지 방법으로 파괴된다. 유용한 열매가 타자에게 안 먹히고 천천히 소진되거나, 타자에게 먹혀서 빠르게 소진되거나. 과연 어떤 것이 식물에 나을까? 식물에 의식이 없다고 가정하면, 두 가지 방법 모두 그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갈 뿐, 좋고 나쁨은 없다. 그러나 더 넓은 세계로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단연코 먹히는 것이 식물에 이롭다.
식물이 최고의 유용성을 함유한 맛있고 영양가 넘치는 과육을 동물에게 제공하면, 그만큼 특급 서비스로 동물이 도와준다. 식물은 동물의 날카로운 이빨에 우적우적 먹히지만, 그 고통(?)은 그 후 이어지는 과정에 비교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도토리가 다람쥐에 먹혔다고 가정해 보자. 이미 다람쥐 배로 들어간 도토리는 이미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도토리가 동물에게 파괴되는 시간은 단 3분이지만, 도토리의 씨앗은 동물의 안전한 위장 속에서 편안히 보살핌받고, 무려 3개월 동안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다. 식물의 입장에서 3분을 투자해서, 3개월을 이겨내고, 내년 따뜻한 봄에 새롭고 더 멋지게 태어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유용한 전략인가! 물론 먹히고 파괴되는 것은 굉장히 무용해 보이지만 말이다. 아래 표를 참고해 보자.
열매가 안 먹혀서 파괴될 때
열매가 먹혀서 파괴될 때
가을 유용성에서 무용성으로 파괴되기
과육이 천천히 썩으며 소진 > 껍질이 단단한 상태로 유지
동물에게 과육이 먹혀서 소진 > 동물의 소화액으로 껍질이 얇아짐
겨울 무용성 상태로 재탄생 준비
과육이 남아있어, 곰팡이와 박테리아에 의해 부패 위험이 크고, 과육의 냄새로 곤충에게 완전히 씨앗까지 먹힐 수 있음
소화과정에서 과육이 제거되어, 병원균 감염 위험 감소, 동물의 똥이 ‘보온재’ 역할을 하여 동결 방지 효과
봄 무용성에서 유용성으로 거듭나기
과육 속 발아 억제 물질과 두꺼운 껍질 때문에 싹이 늦게 핌
위산과 소화 효소가 씨앗 껍질을 얇게 만들어, 수분 흡수 효과가 좋아져서, 싹이 빨리 피고, 발아율이 1.5∼2배 높아짐
여름 유용성 상태로 성장 경쟁
매우 불리한 경쟁환경, 어미 나무 아래 씨앗이 밀집되어 햇빛, 물, 양분 경쟁이 매우 치열함, 부모 나무 근처에서 생존율이 급격히 떨어짐
매우 유리한 경쟁환경 동물이 경쟁이 적은 새로운 장소로 씨앗을 옮겨 줌, 똥 속에 질소/인 등이 필요한 ‘천연 비료’ 역할을 하여 초기 성장에 결정적 도움
결론
1. 식물의 입장에서, 타자(동물)에게 따끔히 먹혀서 파괴됨 > 죽음을 통해 새롭고 더 나은 재탄생으로 거듭남  2. 먹혀서 파괴된 씨앗은 ①껍질 손질 ②따뜻한 똥에 보호 ③경쟁이 적은 신대륙 이동처럼 ‘풀 패키지 특급서비스’를 받음 (마치 멕시코 인신 공회에서 노예들이 죽기 전 초호화 서비스랑 비슷)  3. 그래서 식물은 맛있는 열매를 맺어서 동물들에게 유혹한다! “제발 나를 마음껏 먹고 파괴해서, 똥 속에서 새롭게 키워줘!”
이처럼 식물은 먹히고 파괴되어, 다음 해 훌륭히 재탄생을 이뤄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파괴되고, 먹혀야 내재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림 라스코 벽화] 진정 인류는 동물과 먹고 먹히며, 하나가 되고 싶었을까? 라스코 동굴 가상 투어(프랑스 문화부/구글 아트앤컬처 연계) www.lrl.kr/bDezH
[그림 라스코 벽화] 파괴되는 새 머리 인간과 소
내재성 되찾기 2 : 놀이 속에 예술(라스코 벽화)
바타유는 그 해답을 놀이의 한 형태인 예술을 이야기한다. 놀이란 무엇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인간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 활동과 일을 제외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활동’이라고 말한다. 즉 놀이는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 노동 후 남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이다. 바타유는 약 2만 년 전 라스코 동굴에서 행해졌을 희생제의 때, 살육과 파괴는 자연스러운 축제·놀이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나와 동일시되는 소중한 동물을 죽인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틀, 우리 부족의 금기(禁忌), 인류의 유용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단편적인 예로 라스코 동굴에 그려진 동물의 수는 무려 700여 점에 달하지만, 인간으로 보이는 그림은 오직 1개(그림2 참조)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의 저자 오선민 동화 인류학자는 ‘그 당시 인간을 그리는 것은 금지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부정하고 파괴해야 내재성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바타유에 의하면 고대 인류는 라스코 벽화를 통해, 가장 소중하고 신성한 ‘소’를 죽여서 ‘소’가 되고자 했다. 소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1]의 거대한 소, 말, 사슴 떼들을 보라. 참으로 웅장하고 생명력이 충만하다. 육중한 몸을 둘러싼 부드러운 곡선과 곧게 뻗은 다리는 마치 벽화 밖을 뛰쳐나올 것 같다. 이에 반해 그들의 표정은 무심하다. 현대인처럼, 어떤 목적, 유용성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모습이 아니다. 그저 우주 자연 그대로의 흐름과 하나 되어, 생명을 자연에 맡기는 듯하다. 언제 어떻게 인간에게 파괴되어 먹힐지 모르는 상황이어도, 초연함을 유지한다. 이렇게 고대인들은 자연의 생명력을 한껏 응축한 동물들을 먹고, 예술로 승화시켜서 동물성을 그대로 흡수하고자 했다. 마치 내가 소인지, 소가 나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인간의 유용성을 파괴하여, 동물성으로 초월하고 싶었다.
이때 파괴가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살아있음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찰나의 경계에 바타유는 격렬한 흥분의 감정에 주목한다. 이는 ‘지금, 이 순간의 신성함’과 맞닿아있다. 생사의 경계가 바뀌는, 생명의 변화를 온몸으로 만끽한다. [그림2]를 보면, 사냥하다 죽음 직전에 뒤로 자빠지는 인간이 보인다. 인간의 머리는 어느새 새의 부리로 바뀌고, 두 손가락은 새의 발가락처럼 4개가 되어 ‘동물’로 바뀌었다. 마치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단순화 시켰다. [그림1]에 비하면 매우 초라해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화가 강렬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불끈 솟은 성기는 엑스터시와 도취의 절정을 보여준다.
바타유는 말한다. 발기는 '죽음의 순간에 느끼는 오르가슴'을 표현한 것이라고. 즉 살해 행위가 주는 극단적 흥분·엑스터시(ecstasy)와 성적 절정이 같은 종류의 '작은 죽음(la petite mort)'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섹스할 때, 서로의 몸이 먹히는 경험을 한다. 몸의 합체로 고통과 환희가 뒤섞이며, 영혼은 결합한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너도 없다. 그저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된다. 실제로 사피엔스는 인류가 농협 혁명(약 1만 년~7천 년 전)으로 유용성을 향해 달려갔을 때, 내재성으로 돌아가는 희생 제의를 주기적으로 행했다. 이는 4대 문명으로 이어져, “혼음난무(混淫亂舞: 질서 없이 뒤섞인 성적 행위와 춤)”는 제의·놀이·축제의 큰 축을 이루며 전 세계에서 널리 행해졌다.
라스코의 벽화처럼, 인류는 예술로서 소진과 파괴를 경험하고, 내재성을 회복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신성(神聖)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인도 동굴에 벽화를 그려야만 성스러움과 숭고함을 체험할 수 있을까? 안심하라. 유용성을 파괴하는 모든 놀이(예술, 문학, 명상, 무예, 바둑, 술래잡기 등등)를 통해 가능하다.
내재성 되찾기 3 : 놀이로 먹히는 재미
뭔가 인생이 답답할 때, 많은 이들이 잊어버린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 한다. 뭣도 모르고 순수하게, 자유롭게 뛰놀며 느꼈던 도취감. 한번 어렸을 적 놀이에 심취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레고 블록을 부수고 쌓다 보니, 순식간에 몇 시간이 흘렀다. 정신없이 놀이터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술래잡기했는데,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다. 해변에서 파도 소리와 바람의 출렁임에 장단을 맞추고, 모래성을 허물며 놀았는데 벌써 집에 갈 시간이다. 따뜻한 밥을 든든히 먹고, 모든 에너지를 아낌없이 소진하고 온 아이들은 달콤한 꿀잠에 빠진다. 놀이는 ‘먹고 먹히는 행위’를 그저 미친 듯이 신나게 하는 것이다. 가위는 보를 먹고, 보는 가위에 먹힌다. 술래는 잡고(먹기), 도망치는 이들은 잡힌다(먹히기). 모래성과 레고 블록 또한 파괴(먹히기)와 창조(먹음)를 매번 새롭게 행한다. 지금까지도 널리 행해지는 땅따먹기, 바둑, 체스, 윷놀이 등도 모두 돌과 말이 먹고 먹히는 그 아찔한 순간으로 우리를 매혹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먹히기’이다. (바둑돌, 장기말이) 먹힌다는 것은 내가 소중히 공들인 금기(禁忌)와 틀이 해체되는 것이다. 즉 견고했던 내 틀이 무너지고, 타자의 틀이 들어온다. 반대로 먹는 것은 타자의 틀을 깨뜨려, 내 것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결국 먹히던, 먹던 타자와 나는 섞인다. 그런데 문제는 먹기만 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먹는 것은 즐겁고, 먹히는 것은 괴롭다는 것은 주입된 엉터리 틀이다. 이는 음식을 삼키는 것은 좋고, 똥을 싸는 것은 나쁘다는 말과 같다. 배부를 때 음식을 삼키는 것은 참으로 곤욕이고, 몸이 무거울 때 똥을 싸면 그토록 시원할 수가 없다.
처음에 아이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 그저 먹기만 하며 승리를 갈망한다. 그러다 안 먹히려고만 하면 점점 친구가 떠나고, 외톨이가 된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다. 놀이를 주도하는 현명한 동네 형·언니들은 그 원리를 이미 숱하게 경험했다. 그래서 먹히기를 낯설어하는 이들에게, 먹히는 재미를 따끔하게 알려준다. 오! 이럴 수가! 내 고집을 내려놓고, 동네 스승 말대로 할 때, 놀이가 더 재미있을 수 있구나! 상대에게 져서 먹히고, 넘어지면서 더 훌륭한 놀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니! 아이들의 틀은 말랑말랑하다. 더 신나고 재미있는 것이면, 주저 없이 자신의 규칙과 틀을 갈아엎는다.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의 유용한 공부법을 깨트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공부법으로 탈바꿈한다. 이때 그들에게 공부는 놀이로 바뀐다.
이렇게 우리는 놀이를 통해, 재미있게 먹히는 환경을 주기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야 한다. 비단 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어른, 할아버지들에게도 말이다. 그렇게 자유롭게 넘어지고 실험할 때, 유용성의 틀은 무용하게 바뀌고, 무용했던 틀은 유용하게 변화한다. 생명력이 춤을 추고 파괴되는 즐거움에 온몸이 설렌다.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놀이로 확장된 세계
놀이를 통해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는 것은 바타유의 표현을 빌려오면, ‘황홀경’을 체험한 것이다. 이러한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의 도취감을 우리 몸속 깊숙이 심는다. 그렇기에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놀이(시, 그림, 악기, 바둑, 무예 등)는 신성함을 고양하는 예술로 승격된다. 이러한 놀이가 점점 수련으로 이어지면, 나를 가장 답답하게 하는 틀부터 파괴한다. 물론 고통이 수반될 수 있다. 굳이 빗대면, 따끔한 침을 맞고 막혔던 피의 흐름이 뚫린다. 숨통이 트이고 해방감이 느껴진다. 파괴의 고통은 시원함으로 바뀌고, 그동안 나를 가둔 좁은 틀을 멀리서 내다보는 힘이 생긴다. 확장된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는 뇌과학에서 두정엽의 활동 저하로 설명한다. 두정엽은 나의 신체 경계를 인식한다. 내가 여기에 있고, 지금 언제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집중이 깊어지면, 두정엽으로 가는 객관적인 정보가 차단된다. 즉, 나와 세상의 구분이 파괴되는 것이다. 미친 듯이 놀다 보면, 몇 시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을 때가 있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 이상하다. 겨우 1시간 놀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해가 저물어(6시간 흐른 후) 엄마가 불렀어요” 실제 6시간이 흘렀지만, 1시간으로 느꼈다는 것은 ‘5시간’이나 시간을 파괴한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상대적으로 소진되면, 공간적 인식의 확장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널리 쓰이는, 복잡한 상대성 이론을 간추린 식으로 적용해 보자.
공간속2+시간속2=빛의속2(고정된상수)공간속도^2 + 시간속도^2 = 빛의 속도^2 (고정된 상수)
우리가 놀이에 집중한다면, 심리적으로 시간의 파괴가 일어난다. 빛의 속도는 약 초속 30만km로 고정되어 있기에, 시간 속도가 점점 줄면(시간의 파괴가 계속되면), 공간 속도는 늘어난다. 운동 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공간 속도’는 ‘공간 에너지’로 바꾸어도 의미가 통한다. 그래서 ‘공간 에너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공간적 인식의 확장’으로 설명된다. 이를 종합하면, 집중이 깊어지면 나의 의식적 공간이 넓어진다.
이것은 심리적 차원의 현상을 과학으로 풀어본 하나의 가설이다. 심리적 차원은 현대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러나 앞으로 양자역학의 발달은 점점 심리와 마음처럼 안 보이는 차원을 더 잘 설명해줄 것이다.
놀이로 ‘성스러움과 속됨’ 소통하기
바타유는 성스러움과 속됨이 소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노동과 놀이, 삶과 죽음, 확장과 파괴가 막힘없이 연결되는 것이다. 과거의 인류는 제사·놀이(축제)·예술을 통해 내재성을 회복하여 성속(聖俗)을 연결하였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끝없는 유용성 축적과 확장은 인간을 사물에 지배당하는 위기로 몰아넣었다. 물질적으로는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게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답답해지고 공허해진 것이다. 우주 자연의 모든 생명은 확장과 파괴를 순환하며 살아가는데, 현대 사회의 이념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이에 점점 많은 사람이 본능적인 파괴욕을 점점 이상한 형태로 행하고 있다. 그래서 잊어버린 내재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는 내재성을 되찾는 매우 신나는 행위이다. 우리 선조들은 노동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자연의 동물성을 회복했다. 유용성을 신명(神明) 나게 파괴한 것이다. 신명(神明)은 ‘신을 밝힌다’라는 뜻이다. 자연(신)의 이치를 밝히며 신(神)바람을 일으킨다. 그 이치의 핵심은 먹고 먹힘이다. 희생 제물을 신에게 먹히고, 신이 베푼 자연의 음식을 먹는다. 신과 합일, 자연과 통합! 여기에 음악과 춤이 빠질 수 없다. 음악은 자연의 공기와 인간의 악기가 만나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바람과 새들의 소리와 어울려, 리듬을 타고 새로운 곡으로 연주된다. 즉 신(자연)의 소리를 듣고(귀로 먹히고),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다. 춤은 신(자연)의 소리를 듣고 직접 몸으로 표현한다(먹는다). 몸으로 정신을 먹는 것이다. 하나의 소리를 함께 듣는다는 것은, 그 집단이 모두 하나의 소리에 취해서 정신이 하나로 모인다. 내 생각, 네 생각의 분별이 없어진다. 같은 동작으로 사자춤을 추면 내 몸과 네 몸이 모두 동물이 되어 구분이 사라진다.
이렇게 파괴당하고(먹힘) 확장하는(먹고) 놀이를 통해, 금기(禁忌)를 깨고 시원한 해방감을 맛본다. 나와 타자의 경계,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허물어지고, 점점 공감과 이해의 세계로 지평이 넓어진다. 마치 아이들이 처음 만났어도, 같이 놀다 보면 금방 친해지는 것처럼. 너와 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유용함의 속됨의 세계로 돌아가면, 뭔가가 달라져 있다. 재충전의 느낌이 들고, 일할 때 새로운 활력이 돈다.
이제야 나는 왜 바둑을 오랫동안 두어왔는지 좀 알 것 같다. 그동안 너무 승리와 유용성을 위해 바둑을 두면서 뭔가가 불편하고 답답했다. 바둑을 좀 편하게, 놀면서 두지 못했다. 상대 돌을 먹으려고만 했지, 상대의 정수(正手)에 유쾌하게 먹힐 줄 몰랐다. 아마도 상대의 준엄한 정수(正手)가 나의 존재감을 없애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바둑이 끝나고 멀리서 내려다보며 복기하면, 신기하게 내 돌이 파괴당했어도 생각보다 안 아프다. 아니 시원하다. 과도한 유용성으로 뭉친 자존심과 편견이 파괴되는 짜릿한 전율인가. 대국 중 해결 못 한 갈증이 풀린다.
이때 상대의 마음이 진하게 전해져 온다. 분명 대국 중에는 전혀 몰랐던 그 상대 마음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먹고 먹히며 피 터지게 싸웠지만, 대국 후 좀 더 인간적인, 멋쩍은 미소가 피어난다. 신기한 것은 서로의 잘 둔 수를 칭찬해주는 것보다, 서로의 실수를 파괴하고 깨우칠 때 더욱 관계가 깊어진다. 마치 아이들이 놀다가 다투면서 친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왜 놀이를 통해 ‘파괴적으로 먹혀야’하는지 실감이 난다. 상대방이 아무리 강하고, 무섭고, 잘 두어도 괜찮다. 놀면서 신(神)나게, 신(神)이 낳게, 신(神)을 낳도록, 새로운 정신(精神)이 태어나도록 먹히고 파괴당할 것이니깐! 마지막으로 이 세상 모두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한다.
모든 인간의 행위를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고대의 지혜였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해왔다.  ···(중략)··· 하지만 놀이 개념은 이 세상 생활과 행위에서 뚜렷하면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in play), 그리고 놀이로서(as play) 생겨나고 또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혀 왔다. 「Homo Ludens 22p, 요한 하위징아」